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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을 건너온 역사(38)   12. 모색1. 새로운 조선이 꽃 핀 자리

입력 : 2022-04-18 02:46:32
수정 : 2022-11-15 00:27:13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38)

 

12. 모색1. 새로운 조선이 꽃 핀 자리

(2) 민중시의 탄생, ‘적성촌에서

 

△ 적성의 한 마을/ 정약용은 나직한 풍경 속에서 민중의 삶을 읽어낸다.

 

시냇가 찌그러진 집 뚝배기와 흡사한데/ 북풍에 이엉 걷혀 서까래만 앙상하다

묵은 재에 눈 덮여 부엌은 차디차고/ 체 눈처럼 뚫린 벽에 별빛이 비쳐드네

집안에 있는 물건 쓸쓸하기 짝이 없어/ 모조리 다 팔아도 칠팔 푼이 안 된다오

개꼬리 같은 조 이삭 세 줄기 걸려 있고/ 닭 창자 같은 마른 고추 한 꿰미 놓여 있다

깨진 항아리 뚫린 곳 헝겊으로 발랐고/ 찌그러진 시렁대는 새끼줄로 얽매었네

놋수저는 지난날 이정에게 빼앗기고/ 쇠냄비는 엊그제 옆집 부자 앗아갔지

닳아 해진 무명이불 오직 한 채뿐이라서/ 부부유별 그 말은 가당치도 않구나

어린것들 입힌 적삼 어깨 팔뚝 나왔거니/ 태어나서 바지 버선 한번 걸쳐보았겠나

큰아이 다섯 살에 기병으로 등록되고/ 작은애도 세 살에 군적에 올라 있어

두 아들 세공으로 오백 푼을 물고 나니/ 어서 죽길 원할 판에 옷이 다 무엇이랴

갓 난 강아지 세 마리 애들 함께 잠자는데/ 호랑이는 밤마다 울 밖에서 으르렁거려

남편은 산에 가 나무하고 아내는 방아품 팔러 가/ 대낮에도 사립 닫혀 그 모습 참담하다

아침 점심 다 굶다가 밤에 와서 밥을 짓고/ 여름에는 솜 누더기 겨울에는 삼베 적삼

들냉이나 캐려 하나 땅이 아직 아니 녹아/ 이웃집 술 익어야만 찌끼라도 얻어먹지

지난봄에 꾸어 먹은 환자가 닷 말이라/ 이로 인해 금년은 정말 살 길 막막하다

나졸 놈들 문밖에 들이닥칠까 겁날 뿐/ 관가 곤장 맞을 일 걱정일랑 하지 않네

어허 이런 집들이 온 천하에 가득한데/ 구중궁궐 깊고 깊어 어찌 모두 살펴보랴

직지사자 그 벼슬은 한 나라 때 벼슬로서/ 이천 석 지방관도 마음대로 처분했지

어지럽고 못된 근원 하도 많아 손도 못 대/ 공황 다시 일어나도 바로잡기 어려우리

아서라, 옛날 정협 유민도를 본받아/ 이 시 한 편 그려내어 임에게나 바쳐볼까

(정약용. 봉지염찰도적성촌사작)

 

△ 이계심 사건을 처리하는 정약용(사진출처. 시선뉴스)

179433세의 다산 정약용은 암행어사 임무를 맡아 임진강 연안의 고을을 탐문한다. ‘봉지염찰도적성촌사작은 이때 목격한 적성고을 모습이다. 현감 이덕무가 적성고을을 떠난 5년 뒤다. 시는 삼정의 문란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 모습을 절절하게 그린다. 정약용의 생애를 관통하는 민중적 사고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현대의 민중시를 방불케 하는 사실적 묘사가 특출하다. 아련한 전원묘사 따위는 찾을 수 없다. “시냇가 찌그러진 집 뚝배기와 흡사한데, 북풍에 이엉 걷혀 서까래만 앙상하다시작부터 허물어질 듯 힘겨운 백성의 삶을 던져놓는다. 전원을 살피다 문득 들어온 백성의 삶이 아니다.

보이는 낱낱 묘사는 계속된다. 눈앞의 풍경이지만 누구도 보지 못했고, 누구도 쓰지 않았던 장면이 속속 등장한다. 연민이 아니라 공감. 이것은 당대 누구도 이르지 못한 다산의 미덕이다. 많은 실학자들이 양반의 허위를 파헤치고, 신분차별을 비판했지만 하층민의 고통에 이만큼 공감한 사람은 없다. ‘우화정에 올라’, ‘노량진에 돌아와 교지를 기다리면서’, ‘대장장이 노래’, ‘굶주리는 백성들의 노래등 암행어사 시기에 쓴 그의 시는 하나같이 민중의 고통을 정면에서 비춘다. 적성, 마전, 연천, 삭녕 네 고을을 조사한 정약용은 전직 수령 둘을 유배하라고 상소한다. 그 둘은 정조의 최측근이었지만 예외를 두지 않았다.

 

얼마 뒤 정약용은 황해도 곡산부사에 임명된다. 정쟁을 피해있으라는 정조의 배려였다. 부임과 동시에 그는 문젯거리였던 이계심 사건을 처리한다. 이계심은 부민 1천명을 이끌고 관아로 몰려와 소요를 일으키다 도망친 자였다. 정약용은 이계심을 석방한다. 이유가 놀랍다.

관이 밝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백성이 폐단을 들어 관에 대들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에서 천금으로 사들여야 할 것이다.(정약용. 자찬묘지명중에서)”

처벌은커녕 천금을 주고 사야한다고 말한다. 백성들에게 대놓고 관에 대들라고 부추긴다. 현대 민주주의도 따라가기 힘든 높은 민중의식을 그는 보여준다. 학자로서 다산의 자리가 유배의 고통을 이겨낸 각고의 결과라면 개혁정치가 다산의 면모는 젊은 암행어사 시절에 이미 빛났다고 할 것이다. 임진강 연안 고을에서 그는 민중의 실상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려냈다.

이런 집들이 온 천하에 가득한데, 구중궁궐 깊고 깊어 어찌 모두 살펴보랴 () 이 시 한 편 그려내어 임에게나 바쳐볼까

한편 정치가 정약용의 패기가 분출한 바로 그곳에서 18년 유배의 빌미가 생겨난다. 그때는 누구도 알지 못했던 일이다.

 

이재석

DMZ생태평화학교교장

[임진강 기행]

[걸어서 만나는 임진강] 저자

 

 

#1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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